2008년 8월 8일, 역대 가장 많은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베이징 하계올림픽이 개막됐습니다. 전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 개막일이지만, 이 날은 KBS 사람들에게는 슬픔과 치욕의 날로 각인돼 있습니다. KBS 건물 안에 수백 명의 사복경찰이 난입해 KBS 사장을 끌어내린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상 속에는 정연주 사장을 해임하려는 이사회에 맞서 이를 막으려는 직원들을 사복경찰이 난입해 끌어내는 생생한 현장이 담겨 있습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로 유명한 신원호 PD의 KBS 시절 얼굴 모습도 잠깐 등장하네요.
이명박 정권이 이처럼 불법과 탈법, 그리고 경찰력을 동원해 KBS 사장을 끌어내리려 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당시 정권에 비판적인 KBS를 손봐서 자신의 애완견처럼 만들고자 했던 거죠.
정권은 교체됐지만 KBS에는 기자와 PD들의 제작 자율과 언론 자유를 존중하는 정연주 사장이 버티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이명박 정권의 장관 후보자 등에 대한 비판적인 검증 보도가 9시 뉴스에서 줄지어 보도됐습니다.
또한 당시 들불처럼 번졌던 미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도 가감 없이 주요뉴스로 다뤄졌으니, 사실 정권으로선 KBS가 눈엣가시 같았을 겁니다. 지금은 다소 하락했지만 당시 KBS 9시 뉴스의 시청률은 20%를 훨씬 넘을 만큼 위력적이었으니까요.
MB 정권이 정연주 사장을 끌어내리고 대신 KBS 사장으로 앉히려했던 사람은 사실 김인규 씨였습니다. 김인규 씨는 대통령 선거 당시 MB의 언론특보를 맡아 당선에 기여한 인물입니다. MB의 최측근으로 선거캠프에서 공을 세운 김 씨는 그러나 곧바로 KBS 사장에 취임하지는 않습니다.
김 씨는 정연주 사장 해임으로 빚어진 1년여의 잔여 임기를 다른 사람이 채우고 나자, MB 정권 2년차인 2009년 11월에 KBS 사장 자리에 오릅니다. 자신들이 계획했던 KBS 장악에 나선 거죠.
수요일 밤 모임
김인규 씨는 KBS 기자 출신으로 주로 정치부에서 오래 일했습니다. 기자 시절 김 씨가 어떤 훌륭한 기사나 특종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이른바 '민완(敏腕 : 일을 재치 있고 빠르게 처리하는)' 기자가 아닌 '민원(民願)' 기자로 통했습니다. 기자를 하면서 주변 사람의 민원이나 부탁을 잘 챙겨줌으로써 마당발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인적네트워크를 만들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KBS 내에, 특히 기자들이 일하는 보도본부 안에는 이른바 '김인규 라인'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KBS 내부 사람들은 '수요회'라고 부릅니다. 대통령이 MB로 바뀌자 기자 수십 명이 어느 수요일 저녁 한 식당에 모여서 정연주 사장을 몰아내고 김인규 씨를 새 사장으로 세우자고 모의했기 때문에 이름이 '수요회'라고 합니다.
'수요회'의 주요 인물들은 이후 보도본부장과 국장 등 KBS의 요직을 꿰차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현재 KBS 사장인 고대영 씨입니다. 고 씨는 이 모임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권 내내 보도국장과 해설위원장, 보도본부장 등 모든 요직을 섭렵하다시피 했습니다.
김인규 씨가 KBS 사장이 된 이후 KBS에선 단 한 순간도 정권 편향, 편파보도 시비가 끊인 적이 없습니다. 특히 당시 정권이 집착했던 뉴라이트 역사관을 TV속으로 끌어들여 국민을 호도하려 했다는 비판이 크게 일었습니다.
4.19동지회, 광복회 등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재자 이승만을 찬양하는 편파적인 다큐멘터리 제작이 강행됐고, 일제 강점기 일본군 장교 출신의 친일 인사 백선엽을 찬양하는 프로그램이 끝내 방영됐습니다.
또한 4대강 기공식은 빠짐없이 생중계됐고, G20 행사·자원외교 등에 대한 홍보성 과장 보도 등이 KBS 채널을 채웠습니다. 반면 4대강을 비판하는 프로그램이나 뉴스, 천안함의 진실을 추적하는 방송은 불방되거나 온갖 방해 끝에 본질이 훼손된 채 가까스로 나가는 일이 잦았습니다.
민주당 도청 의혹
김인규 사장 시절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그건 이른바 민주당 도청 의혹 사건입니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의 내부 회의를 누군가가 도청한 뒤 그 녹취록을 국회 문방위 여당 간사인 한선교 의원에게 넘겨줬다는 의혹이 일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몇몇 언론이 도청의 당사자로 KBS 기자를 지목해 기사를 내보냄으로써 큰 파장이 일었는데, 당시 KBS 정치부 등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장이었던 김인규 씨는 제대로 된 반박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지금 KBS 사장인 고대영 씨 역시 당시 뉴스 부문 총책임자인 보도본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검찰과 경찰이 증거부족 등으로 의혹을 산 KBS 기자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려주는 덕에 진실은 수면 아래로 묻혔고, 관련된 KBS 사람들은 간신히 형사 책임을 면했습니다.
이렇듯 이명박 정권의 낙하산 사장인 김인규 씨와 그가 임명한 간부들은 KBS를 국민이 아닌 청와대를 위한 방송으로 전락시켰고 국민의 신뢰는 날로 추락했습니다.
이 때문에 2012년, 새노조라 불리는 언론노조 KBS본부 조합원들은 'MB특보 사장 김인규 퇴진과 공정방송 쟁취'를 위한 파업을 100일 가까이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 성과로 방송법에 특정 후보의 선거캠프에서 직책을 맡은 사람은 KBS 사장이 되지 못하는 자격제한 조항이 추가됐고, KBS 사장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신설됐습니다.
이처럼 KBS 구성원들에게 김인규 씨는 공영방송을 망친 가장 대표적인 낙하산 사장이자 불공정 방송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승호 PD가 만드는 영화 <공범자들>은 김인규 씨 같은 언론계 적폐 인물들을 찾아가 책임을 묻고 지난 10년간 자행된 언론 장악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드러낼 겁니다.
김인규 씨는 현재(5월 25일) 경기대학교 총장 공모에 지원해 심사를 받고 있습니다. KBS 사장 이후 전쟁기념관 이사장, 장애인재활협회 회장 등 끊임없이 자리를 차지해 온 김 씨가 이번에는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의 총장마저 바라보고 있습니다.
글ㅣ성재호 (KBS 기자, 언론노조 KBS본부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