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20일. 나는 19년 동안 기자로 일했던 MBC에서 해고됐다. MBC는 나의 해고를 문자메시지로 통보했는데 해고사유는 단 여섯 글자였다.
해고 통보를 받고 나는 제일 먼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해고됐어."
"정말? 당신이 무슨 짓을 했다고?"
"회사 기강을 문란하게 했대."
"기강 문란? 그런 해고사유도 있어? 당신 혼자 잘린 거야?"
"아니, 한 명 더 있어."
"누군데?"
"최승호 선배."
"그럼 영광이라고 생각해."
남편의 해고 소식을 들은 아내는 오히려 남편의 레벨이 격상됐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올해 1월 25일. 한겨레가 MBC백종문 본부장의 발언을 1면 톱으로 보도했다. 백종문 씨가 어떤 극우매체와 MBC 해직언론인 문제에 대해 나눈 대화의 녹취록을 단독 입수한 거다. 기사의 제목은 'MBC 임원 "최승호-박성제 증거 없는 것 알고도 해고" 자인'이었다. 4년 전 우리를 잘랐던 장본인 중 한 명이 '기강 문란'이라는 해고사유가 개소리였다는 사실을 제 입으로 자백한 셈이다.
나는 이 기사를 보고 사필귀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평소 알고 지내던 대학교수 한 분은 전화를 걸어와서 이렇게 말했다.
"박기자, 신문 봤어요. 난 박기자가 그냥 노조 활동하다가 해고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대단한 사람이었네. 최승호 PD랑 같이 해고됐었다니 말이야."
그날 한겨레 보도 덕분에 해직언론인으로서의 나의 레벨은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최승호급이라는 것 말이다. 지금도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MBC 해직언론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물론 최승호 PD와 함께 죄 없이 해고됐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굳이 'PD수첩'의 간판이라는 사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MBC의 수많은 후배들에게 그는 저널리스트로서의 롤모델이자 본받아야 할 표상 같은 존재였다. 황우석 박사의 대국민 사기극, 검사와 스폰서, 4대강 사업 같은 성역을 다루면서 그가 보여줬던 원칙과 용기,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취재력을 떠올려 보면 그런 심정이 이해가 갈 것이다. 19년 취재현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나 역시 그를 보면서 '저 양반 혹시 정체를 감춘 슈퍼맨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심지어 방송도 잘 한다. 부리부리한 왕방울 눈매로 카메라를 직시하면서 경상도 억양을 살짝 곁들인 멘트로 조금 투박하게 진행하는 모습이 꽤 매력적이다.
게다가 나는 PD가 아닌 기자여서 같이 일해 본 경험이 없는데다 입사도 7년이나 늦은 후배였기 때문에 그가 더욱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진 게 사실이다. 가왕 조용필 앞에서 어떤 가수가 가창력을 뽐낼 수 있겠는가. 친밀감보다 경외감이 먼저 느껴지는 대선배였다고나 할까. 함께 해고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최선배가 언론인으로서의 강철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여린 심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게 된 건 해고 이후 주말마다 산행을 함께 하면서부터다. 우리는 등산로에서 수많은 대화와 토론을 나눴지만 나는 그가 다른 이의 '뒷담화'를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자신을 해고한 이들도 인간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권력의 망나니로 전락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나락으로 떨어진 친정 MBC를 걱정할 뿐이었다.
게다가 후배들과 만날 때는 물론 취재원들과 소주 한 잔을 해도 밥값, 술값을 먼저 계산해 버리는 훈훈한 버릇이 있다. 아마 김영란 대법관이 최승호라는 언론인을 알았다면 그 법을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거다. 그런 최선배가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을 다큐 영화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걱정이 앞섰던 게 사실이었다. 최선배가 아무리 최고의 PD라지만 TV 시사프로그램과 영화는 좀 다르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 영화가 실패하면 최승호의 경력에 오점으로 남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좀 있었다.
하지만 최선배는 보란 듯이 '자백'을 기가 막힌 영화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첫 시사회가 열렸던 전주영화제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달려가 '자백'의 첫 장면을 본 순간, 나는 내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자백'은 더없이 흥미진진한 영화였다. 어느 날 갑자기 간첩이 된 피해자들의 아픔, 국가가 은폐한 진실을 추적해 가는 과정, 그리고 진실조작 책임자들의 부끄러움 모르는 민낯들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스릴러보다 스릴 있고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했다.
국정원의 치부를 파헤쳐 나가는 그의 모습은 힘센 놈들하고만 싸운다는 그의 원칙의 결과물일 것이다. 카메라를 피하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공항 화장실까지 쫓아가서 간첩조작의 책임을 추궁하는 불굴의 취재 정신을 보면 같은 언론인으로서 '나 같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간첩으로 몰려 한 순간에 인생이 망가져버린 이들의 사연을 듣고 안타까워하는 그의 얼굴, 북한의 피해자 가족과 인터뷰를 시도할 때 미안함으로 떨리는 그의 목소리는 바로 최승호의 여린 성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끝난 후 나는 생각했다.
'뭐야, 이 영화. 인간 최승호 그 자체잖아.'
과연 '자백'이 멀티플렉스에서 제대로 개봉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백'이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영화사에서 역사적인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최승호가 아니면 만들 수 없었던 영화, 최승호의 모든 것이 담긴 '자백'이 개봉하는 날, 그에게 소주 한 잔 따르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난 정말 운이 좋은 언론인이에요. 선배와 함께 해고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