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의 심장부를 겨냥하다

3화. MBC가 버린 <자백> 영화로 탄생하다

2016-06-27

위 영상은 유우성 씨의 여동생 유가려 씨가 처음 국정원 밖 세상으로 나온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2012년 가을 한국으로 와서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에 들어간 그녀가 무려 179일 동안 갇혀 있다가 풀려난 직후 촬영된 영상입니다. 그녀가 풀려 나오는 과정에는 국정원과 변호인단 간의 치열한 법적 다툼이 있었습니다. 요즘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을 두고 벌어지는 양측의 공방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국정원은 필사적으로 유가려 씨를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녀가 나가서 변호인단을 만나면 그 동안 받아 놓은 자백이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것입니다. 반면 변호인단은 가장 중요한 증거인 여동생의 자백이 어떤 상황에서 이뤄졌는지 파악하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변호인단은 인신구제 재판을 신청했습니다.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에 대한 인신구제 재판에서는 국정원은 종업원들을 법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가려 씨 경우에는 법원에 데려갔고, 판사는 유가려 씨가 스스로 판단하라고 결정했습니다. 가려 씨는 혼란을 느꼈습니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법정을 나갔습니다. 그러자 국정원 여직원들이 따라 들어와 계속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국정원은 이날 중대한 실수를 했습니다. 유가려 씨로부터 허위 자백을 받아낸 장본인이자 가장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큰삼촌이라는 수사관이 현장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화장실의 가려 씨에게 전화로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나가면 일이 복잡해져. 일단 돌아와'라고 설득했지만 가려 씨 마음은 돌아서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큰삼촌 수사관에게 '하루만 변호사들을 따라갔다가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유우성 사건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여동생을 더 이상 가둬 놓지 못하게 되면서 국정원은 패배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 때의 교훈 때문인지 국정원은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을 법원에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법정에서 판사의 질문도 받게 할 수 없다는 국정원의 태도는 이번 사태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던지게 합니다.

가려 씨는 결국 서울 중앙지법의 재판정에서 나와 변호사들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실로 왔습니다. 오자마자 찍기 시작한 이 영상에서 가려 씨는 '금방이라도 국정원 직원이 나를 잡으러 오는 것이 아닐까'하는 공포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국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먼저 쭉 좀 이야기해주시겠어요? 힘드시겠지만?"

질문을 던진 사람은 MBC의 이호찬 기자였습니다. 시사매거진 2580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국정원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유가려 씨를 인터뷰한 첫 번째 언론인이었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가려씨는 마침내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습니다. 

"(국정원 합신센터에서) 조사 받으면서 그 선생들이 도와준다고, 오빠와 같이 살게 하고 도와준다니까, 그것만 믿고..오빠가 이 다음에 잘 된다니까, 지금 힘들어도 다 잘될 거라니까, 그거 믿고 거짓 진술도 하고..근데 지금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오빠가 잘 되도록 도와주고, 오빠와 함께 살도록 해준다'는 말을 믿고 거짓 진술을 했는데 지금 보니 사실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거짓 진술이란
'오빠가 간첩'이라는
유가려 씨의 자백을 말합니다

국정원은 가려 씨의 자백을 받은 뒤 오빠 유우성 씨를 구속했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2013년 초, 대선 댓글 사건으로 위기에 몰려 있던 국정원으로서는 그 이상 호재가 없었습니다.

동아일보 등 보수언론들은 '서울시 공무원이 탈북자 1만 명의 신원 정보를 북한 보위부에 전달했다'고 대서특필했습니다. '댓글 사건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은 필요하다는 것을 웅변하는데 그 자백을 한 장본인이 국정원 수사관들의 회유로 한 허위자백이었다'고 털어놓은 것입니다. 정상적인 언론 상황이었다면 이 뉴스는 그 날 밤 MBC 뉴스데스크로 '단독'을 달고 방송됐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상은 MBC를 통해 방송되지 못했습니다. 방송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더 이상의 취재도 차단됐습니다.

당시 이호찬 기자와 시사매거진 2580 담당부장은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기자: "이 사건 사실상 유일한 증거였던 동생이 진술을 번복했습니다. 회유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합니다. 취재해보겠습니다."

부장: "국정원 취재가 안 될 텐데. 국정원은 인터뷰 안 할 텐데. 국정원 인터뷰가 없으면 형평성에 어긋난다."

기자: "국정원의 입장도 충실히 반영하겠습니다. 인터뷰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입장을 반영하겠습니다."

부장: "MBC가 민변의 나팔수냐?"

국정원은 원래 인터뷰를 하지 않으니 반론을 실을 수 없고, 반론이 없으면 의혹에 대한 취재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MBC 등 공영방송을 장악하고 있는 청와대 해바라기 간부들의 멘탈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결국 이호찬 기자는 취재를 접을 수밖에 없었고, 귀중한 첫 인터뷰 영상은 뉴스타파가 민변으로부터 받아 영화에 쓰게 됐습니다. 만약 MBC의 상황이 정상적이었다면 이 사건은 어떤 행로를 그렸을까요?

아마도 MBC 뉴스, 시사매거진 2580, PD수첩 등의 프로그램들이 국정원의 간첩조작을 파상적으로 조명했을 것이고 유가려 씨가 국정원에서 나온 지 4달 만에 있었던 유우성 1심 재판의 무죄 선고는 국정원의 조종을 울리는 계기가 됐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국정원은 유우성 2심 재판에서 중국 출입경기록을 위조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테고, 대한민국이 국제적인 비웃음을 사는 일도 없었겠지요.

아니 아예 처음부터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는 단 한 건의 간첩조작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10년 동안 배를 곯던 국정원은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다시 수십 년 전부터 조직 내에 내려오는 조작의 노하우를 가동하기 시작했지요.

2580 담당부장이 이호찬 기자에게 취재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때쯤 나는 서울 마포구 뉴스타파 사무실에서 간첩의 여동생이 국정원에서 나왔다는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몇 달 전 보수언론들이 '공무원 간첩이 잡혔다'며 대서특필할 때, 그들은 간첩의 증거가 여동생의 자백이라는 사실은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탈북자 만 명의 신상정보를 북한 보위부에 넘긴 명백한 증거가 나온 것처럼 보도했죠.

그런데 사실은 핵심 증거가 여동생의 자백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감춰진 대량 학살의 현장에 막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 확 끼쳐왔습니다. 흙 무덤을 뚫고 삐져 나온 저 것이 사람의 발가락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거기 수많은 주검들이 누워 있으리라는 느낌 말입니다. 8년 전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가 가짜'라는 제보를 처음 받았을 때와 같은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렀습니다.

이 인간들이 아직도
간첩조작을 하고 있구나

나는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달렸습니다. 유우성 변호인단을 만나러 떠난 것입니다. 그것은 3년 동안의 간첩조작 취재의 첫 발이었습니다.

국가권력의 심장부를 겨냥하다

1화. 공포물인듯 코미디같은 영화 '자백'

2화. "언론이 질문 못하면 나라가 망해요"

3화. MBC가 버린 <자백> 영화로 탄생하다

4화. '자백의 무덤'을 만든 사람, 원세훈

5화. "간첩 조작하려니 힘드시죠?"

6화. '창조간첩'의 달인들

7화. 간첩 공장에서 구출된 사내

8화. 삼성과 국정원, 그리고 '자백'

9화. "눈물이 쏟아진 영화"

10화. "나 최승호랑 같이 해고된 사람이야"

11화. 최광희 영화 평론가가 말하는 <자백>

12화. "자백을 4천만이 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