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의 심장부를 겨냥하다

8화. 삼성과 국정원, 그리고 '자백'

2016-07-26

삼성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 사건을 뉴스타파가 보도한 뒤 대한민국의 현실에 눈을 떴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영화 '내부자들'에서 본 일들이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면서 놀라워했습니다. 뉴스타파 보도 이후 각 종 포털에는 '이건희'라는 검색어가 1, 2위에서 오랫동안 내려올 줄 몰랐습니다. 유튜브에서 뉴스타파의 동영상은 지금 이 시간 870만 뷰를 넘었습니다. 갑자기 유튜브에서 '인기 급상승 동영상'이 되자 한글로 된 동영상의 의미를 몰라서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고 묻는 댓글까지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가슴 서늘한 것은 이 회장이 그런 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이렇게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인데도 주요 언론들은 약속이나 한 듯 뭉개고 있다는 것입니다.

KBS, MBC는 시청자들이 가장 궁금해할 뉴스타파의 동영상은 한 컷도 쓰지 않은 채 이 회장이 부축받으며 걷는 영상 위에 보도하는 기상천외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 회장이 불쌍하게 느껴질 지경이었습니다. 종편들 중 TV조선과 MBN은 좀 부실하긴 해도 동영상을 방송했지만 이건희 회장과 사돈 관계인 동아일보의 계열사 채널A는 동영상을 방송하지 않았습니다. JTBC는 삼성과 특수관계라는 것을 감안하면 봐줄 만한 정도였습니다.

21일 밤 10시경 공개된 뉴스타파 보도를 이튿날 조간에 실은 신문은 한겨레 하나였습니다. 22일 이후에는 보도량이 더 줄어서 지금(26일)은 다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 분위기입니다. 아마 거의 모든 언론은 이 사건에 대해 독자적인 취재에 나서지 않을 것이고 속보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자백'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할 때도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뉴스타파가 '국정원이 유우성 씨의 간첩 증거를 조작했다'고 보도했을 때, 보수언론들은 증거 위조를 문제 삼기보다 국정원을 취재원으로 한 왜곡된 보도를 일삼았습니다. 더 이상 국정원을 변호하기 힘들 정도로 증거 조작이 확실해지자 언론들은 보도량을 확 줄였습니다.

마침내 대법원이 유우성 씨의 무죄를 선고했을 때 언론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보수언론과 공영방송 등 주류 언론들은 국정원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의 관심이 뚝 떨어진 뒤 증거를 위조한 국정원 직원들은 '선고유예'를 받았고, 위조된 증거를 법정에 제출한 검사들은 정직 1개월의 '휴가 같은' 징계를 받았습니다. 유우성 씨 사건 직후 홍강철 씨에 대한 두 번째 간첩조작이 드러났을 때, 언론은 거의 무시했습니다.

주류 언론들은 왜 삼성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과 국정원의 간첩조작에 대해 다루기를 꺼릴까요?

이건희 회장의 경우는 삼성이 쏟아내는 막대한 규모의 광고비가 중요한 원인입니다. 삼성전자의 광고선전비만 한 해 약 2조 7천억 원(2012년 기준)입니다. 우리나라 전체 법인이 쓴 광고선전비의 14%를 차지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광고를 수입원으로 하는 언론들에게 삼성에 대한 능동적인 비판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국정원의 경우는 사회 곳곳에 실핏줄처럼 퍼져 있는 감시망을 갖고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언론사들, 특히 공영언론의 간부나 임원들은 국정원이 자신에 대해 어떤 보고를 하는지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국정원의 보고는 인사자료로 만들어져 정권이 자신을 평가하는 근거가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국정원은 게다가 막대한 규모의 특수활동비를 씁니다. 국정원을 감시하는 국회 정보위원회를 담당하는 보좌관들에게 일상적으로 봉투를 돌릴 정도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류 언론이 절대로 일정한 선을 넘어서서 국정원을 비판하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북 간에 전쟁을 치른 대한민국에서 북한의 위협을 포착하는 국정원이 약해지면 한국 사회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심이 우리 국민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국정원을 약간 비판하는 것은 모르지만 완전히 개혁하는 것은 우리의 안전을 위험하게 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많은 국민에게 내면화돼 있고 주류 언론은 이를 부추깁니다.

삼성을 비판하려면 '삼성이 흔들리면 먹고사는 문제가 힘들어진다'는 공포를 이겨내야 합니다. 주류 언론은 삼성, 그중에서도 이건희 회장은 재벌의 대표 격으로 우리가 오늘처럼 먹고살 수 있도록 해 준 사람이고 그에 대한 과도한 비판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라는 공포를 암암리에 유포합니다.

이 두 논리는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기득권 세력의 권력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재벌이 살아야 국민이 산다'는 논리는 재벌이 노동자들을 적은 대가만 주고 통제할 수 있도록 합니다. 국정원을 통해 북한에 대한 공포심을 극대화시킴으로써 기득권 세력은 민주주의의 과도한 성장을 막고 통제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민중의 소리

그러나 오늘날 재벌 체제의 모순은 더 이상 예전처럼 이건희 회장을 떠 받들 수 없게 합니다. 지난달 삼성전자 서비스의 하청 노동자가 에어컨을 고치다 추락해 사망했습니다. 위 사진은 그의 9살 딸의 일기입니다. '일만 하다 돌아가신 불쌍한 우리 아빠'라는 문구가 아프게 눈에 들어옵니다.

아이 아빠는 기본급이 130만 원밖에 안 돼서 수당을 더 받으려고 하루 14시간씩 일했다고 합니다. 한 시간에 한 콜씩 소화하게 되어 있는 규정 상 안전장비를 챙길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난간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궁극적인 사용자인 삼성전자서비스는 이 노동자의 죽음에 아무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동료 노동자들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찾아가 호소하려 하지만 만나줄 리도 없습니다. 병석에 있지만 이건희 회장은 아직 삼성전자의 회장 신분입니다. 뉴스타파가 보도한 이 회장의 일탈 행위, 특히 그가 성매매에 삼성을 끌어들인 의혹과 하청 노동자의 죽음을 함께 보면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체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재벌에게 '이제 좀 같이 살자'고 요구할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합니다.

국정원은 어떻습니까?

나는 국정원이 '국민 앞에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는 '조작 본능을 가진 괴물 조직'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우성 사건 당시 국정원은 마지막까지 '증거 서류들은 진짜'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홍강철 씨 사건 때도 그랬습니다. 이 외에도 너무나 많은 조작을 저질렀습니다. 댓글 사건,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NLL을 포기'하는 발언을 한 것처럼 거짓말을 한 사건 등 일상적으로 거짓말과 조작을 해왔습니다.

저는 공포를 느낍니다. 만약 국정원이 어느 날 '북한이 남한을 향해 핵미사일을 쏘려고 하니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지? 국정원을 믿고 전쟁을 감수한 선제공격을 해야 하나, 아니면 이 거짓말 그 자체인 조직의 의견을 무시해야 하나?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 이라크 전을 시작한 미국의 사례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정부 부처가 부패와 무능으로 문드러져 있지만 국정원의 경우는 조직의 실패가 국민의 생존을 바로 위협한다는 점에서 훨씬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라도' 국정원을 개혁해야 합니다. 정권이 아니라 국민에게 충성하는 조직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자백'을 만들었습니다. '자백'을 많은 국민들이 보신다면 국정원은 반드시 개혁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다행히 '자백'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2개의 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재벌의 회사들인 대형 영화 체인들이 '자백'에 영화관을 열어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토리펀딩을 선택한 것입니다. 시민들의 힘이 모이면 대형 영화 체인들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오늘로 3억 4천 7백만 원. 3만 4천 명의 후원자가 '자백'을 예매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카카오 스토리펀딩이 시작된 지 단일 프로젝트로서는 최고액입니다. 개봉도 하기 전에 4만 명 가까운 후원자들이 지지해주셨다면 개봉했을 때는 얼마나 더 많은 관객이 보실까요? 우리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건희 회장에 대한 보도를 해야 했습니다.

보도 후 사람들이 묻습니다. '자백'은 괜찮은 거냐고. 주류 언론들이 이건희 회장 성매매 의혹을 거의 무시하면서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정작 저희보다 걱정해주시는 것은 시민 분들입니다. 언론사들이 일말의 양심도 없는 행위를 저렇게 해버리는데 대형 영화 체인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할지 모두 걱정해주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전례를 많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답은 없습니다.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요. 최대한 펀딩 후원자를 많이 모셔서 멀티플렉스가 상영하지 않을 수 없는 큰 규모를 만드는 것밖에 대안은 없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자중하면서 가려고 합니다. 가급적 예단하지 않고 결론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대형 멀티플렉스가 '자백'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는 근거가 포착되면 싸우겠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바꿀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행동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바꿀 수 있습니다. '자백'이 전국 극장에서 상영되는 날, 우리는 더 좋은 세상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국가권력의 심장부를 겨냥하다

1화. 공포물인듯 코미디같은 영화 '자백'

2화. "언론이 질문 못하면 나라가 망해요"

3화. MBC가 버린 <자백> 영화로 탄생하다

4화. '자백의 무덤'을 만든 사람, 원세훈

5화. "간첩 조작하려니 힘드시죠?"

6화. '창조간첩'의 달인들

7화. 간첩 공장에서 구출된 사내

8화. 삼성과 국정원, 그리고 '자백'

9화. "눈물이 쏟아진 영화"

10화. "나 최승호랑 같이 해고된 사람이야"

11화. 최광희 영화 평론가가 말하는 <자백>

12화. "자백을 4천만이 봤으면 좋겠다"